Bumhan 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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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며칠만에 스타벅스에 갔다가 빈 자리를 찾을 수 없어서 낯선 노부부와 합석하게 됐다. 이야기하는 것을 듣자하니 관광차 뉴욕에 들른 모양인데, 꼬장꼬장한 할아버지와 고분고분한 할머니의 태도는 누가 봐도 전형적인 '가부장적 형태의 잉꼬부부' 모습이었다. 보수적이고 강직하며 가부장적인 양상이랄까. 할아버지는 "내 여자는 내가 책임진다" 식의 마초적 태도를 근간으로 하되, 그 덕분에 무척 친절하고 꼼꼼하게 할머니를 챙기고 있었고. 할머니는 "내조는 확실하게"라는 현모양처 간판을 내건 듯, 할아버지가 입을 열면 하던 말도 멈추고 묵묵히 기다리면서 듣고 수긍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뭐 어쨌거나 저쨌거나, 썩 사이좋고 알콩달콩한 부부인 것 같았다고.


  • 여느 때처럼 책을 읽다 그림을 그리다 하고 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내게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하더라. 힐끔힐끔 보고 이따금 눈도 마주치면서도 짐짓 모른 척 하고 있었더니만 급기야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는지 할머니가 먼저 말을 걸어왔고. 금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경쟁적으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면서 뜻밖에도 나는 곧 책도 컴퓨터도 스케치북도 다 덮어버리고 끄덕이며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대공황과 세계대전 이야기, 이민자 1세대 2세대로서 겪어야 했던 배고픔과 역경, 요즘 젊은 것들의 한심한 꼬락서니 등등. 어찌 보면 뻔하고 구태의연한 "노인네 넋두리", 어떤 대목에서는 너무 보수적이고 때지난 말이다 싶기도 했으나, 어째선가 굉장히 빠져들게 하는 구석이 있더랬다.


  •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다고 창세기에 나오잖던가. 이 할매 할배는 말을 걸고 마음을 나눌 대상이 고팠던 것 같다. 고개 끄덕이고 몇 마디 동조해준 것밖에 없는데 뜬금없이 그들은 나를 칭찬하더라. 이야기를 건네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행동이 갖는 힘을 또 한번 생각했다. 여든살이 넘은, 내 나이의 세 배는 되는 노인들이 나와 함께 웃었다. 낯선 사람들에게 살갑지 못하고 친절한 대화에 서툴다고 생각했는데, 그나마 나만큼도 안 되는 인간들이 쌔고 쌘 모양이지. 그래, 짧은 순간 마음을 열고 귀를 여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만은 않은 법이니까.


  • 대화에 대한 관심, 인간에 대한 관심이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얼핏 산발적이던 나의 행보를 엮어주는 한 가지의 공통점. 아무리 퉁명스럽고 낯가리길 일삼는 나같은 인간이라도 다른 인간과 맞닿고 싶어한다고.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다른 인간들의 의미를 짧게 다시 되짚었다.
2009/01/08 23:54 2009/01/08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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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해바라기C 2009/01/09 0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은 다른이의 말을 차분히 들어주기가 힘든 것 같아요. 나이를 먹어갈수록 사소한 것들에도 아집이 생겨서...자기도 모르게 말을 가로 막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baadaa님은 차분히 말 들어주고 신중하게 대답을 해주는 성격이실 것 같은데요?

    • 범한 2009/01/09 08:08  댓글주소  수정/삭제

      소심하고 조심스런 성격탓인지, 저는 상대방이 하는 말을 끊고 가로막거나 대놓고 부정하기가 힘들어요. 덕분에 주로 듣고 앉아있게 되는 편이고. 그래서 손해를 보는 적도 생기지만 나름 얻는 것도 생기더군요. 래리 킹 아저씨가 화술의 비결을 논할 때 "입을 열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면서 듣는 것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적이 있죠. 저도 알고 보면 말이 참 많은 인간이지만, 입을 잘 열지 않고 지낼 때가 많아요.

  2. 승원누나 2009/01/13 23: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2개월 우리 가윤이가
    길 가면서 누구한테나 '안녕~'하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경우 기겁할 정도로 깜짝 놀라면서 너무 좋아하시더라.

    외로운거지...
    아무도 아파트 벤치에 앉은 자기들에게 인사 건네는 사람이 없었는데
    왠 아기가 손까지 흔들며 '안녕~'이라고 하니 놀랄 수밖에...

    • 범한 2009/01/13 2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곧 만 2살이 되는 우리 조카 아이도 요즘엔 말이 늘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1년 전에 마지막 만났을 때는 뷀월왕붸 ... 요런 소리밖에 못 했었는데, 상상만 해도 막 너무 예쁜 거 있죠. (^^)

  3. 승원누나 2009/01/14 09: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응~ 맞아~
    뷀웰왕붸...
    실은 이게 더 귀여워.

    가윤이는 여자애 치고는 말이 늦은 편인데
    가끔은 '곧 말 잘하게 되면 이렇게 귀여운 외계어는 평생 못 듣겠지?'라는 생각에
    '어짜피 잘 하게 될 말, 조금만 더 뷀웰왕붸... 해 줘~'라는 생각마저 들어... ㅎㅎㅎ

    가윤이 외할머니는 늘 '가윤아, 쭝국어 하지 말고...'라고 하신다니까~ ㅎㅎㅎ

    • 범한 2009/01/14 1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전 어느 전공책에선가 소개된 내용이 생각나네요. 독일인 아빠와 프랑스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꼬맹이 애기들이 독어도 불어도 아닌 새로운 중간언어를 만들어냈다는 거에요. 이 희한한 언어는 독어와 불어의 중간 정도 형태를 갖고 있었는데, 두 아기들은 서너살 먹을 때까지 서로 둘만의 이 언어를 사용하다가 결국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히 잊어버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