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mhan Yu
  • 광고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한다는 건 언제라도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놓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거였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더라고.. 무슨 가래침 뱉는 것도 아니고, 누가 쿡 찌른다고 툭 하고 튀어나오는 게 아니니까. 어쩌면 취업후 몇 개월간 프로젝트 맡을 때마다 거침없이 승승장구했던 건 운이 좋았던 거겠지. 이번 일주일은 참 버거웠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일거리, 수시로 숨통을 조이는 독촉전화와 확인 방문. 이 정도로 버텨낸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


  • 아무리 영어에 익숙해져도 모국어같진 않아서 이것도 번번이 뼈저린 핸디캡이 된다. 때론 카피라이터의 지시없이 짤막한 문구, 기발한 펀치라인, 간결한 슬로건을 뽑아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암만 해도 외국어 구사자 입장에서는 한계가 있더라고. 장황하고 현학적인 문장을 다루는 거랑은 또 완전히 다른 센스가 필요한데, 노력하고 노력해도 모국어 화자를 따라잡기엔 도저히 역부족이다. 자존심 상하기도 하지만, 내가 이걸 어쩌겠어.


  • 시키는 작업을 뚝딱뚝딱 잘 해낸다면 훌륭한 기술자가 될 수는 있지만, 지시받지 않은 것을 해낼 수 있는 역량이 없다면 그저 만년 기술자로만 남을 뿐이지. CS 패키지를 내 몸처럼 다루고 각종 코딩과 스크립팅까지 턱턱 해낼 수 있는 실력자라도, 가진 것이 단지 기술 뿐이라면 끝내 기술만 제공하는 인력이 되는 법이니까. 기획에서 카피 제작, 디자인 전반까지 온전히 내 것으로 맡겨졌던 메이저 프로젝트 하나를 맥없이 놓쳐버리고 나니 많이 허망하다.


  • 금요일 퇴근길에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 가볍게 커피 한 잔 하면서 노닥이다 내친 김에 (술김에?) 마주 앉은 그 친구의 얼굴 한 장을 그려줬지. 오랜만에 맘먹고 그리려니 생각처럼 잘 되진 않더라만, 어설픈 그림을 놓곤 정말 닮았다며 좋아라하는 친구를 보니 뿌듯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다시 한 번 생각했지. 기술이 중요하지만 기술이 전부는 아니라는 거. 사진처럼 똑같진 못해도 제법 열심히(!) 그려준 거라서 서로 뜻깊은 흔적이 된 거 아니겠냐고.


  • 예전에 모 교수가 내 사진들을 보면서 기술적으로 흠잡을 부분은 별로 없지만 너무 기술 보여주기에만 치중한 것 같다고 지적한 적이 있었어. 변명할 말이 없었지. 그 무렵 찍었던 사진들은 정말 순전히 기술에만 집중했던 게 맞거든. 굳이 변명하자면야, 사진 기술을 한창 연마하던 초심자 입장에서 열심히 기본기 다지기에 매달렸던 거라고 해야겠지만. 딱히 알맹이는 없이 현란한 기술에만 맛을 들이다 보니, 지금 봐도 그닥 마음에 쏙 드는 결과물은 없거든.


  • 어떻게 그릴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그릴 것인지, 왜 그것을 그리려는지 스스로 대답하지 못한다면 덧없는 기교로 끝나기 쉽더라. 직업적으로건 취미 차원에서건, 자신을 만족시키고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순수한 기술적 기량 이상의 절실함이 필요한 거겠지. 거창한 깨달음도 아니고 퍽이나 뻔한 얘기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아. 기술을 쌓는 것도, 마음을 다지는 것도.
2009/12/12 02:29 2009/12/12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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