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mhan Yu
  • 귀가길 전철에서 음악을 듣다가 문득 생각했지. 난 지금껏 듣고 싶은 음악 못 들었던 적은 없더라. 한창 앨범 사모으기에 정신없던 고등학교 대학교 때를 생각하면, 음반이 절판돼서 못 찾은 적은 있어도 살 돈이 없어서 못 구한 적은 없었거든. 책도 그렇고 영화도 그래. 절판된 책, 상영이 중단된 영화가 아니라면 (시간만 허락된다면) 돈 없어서 못 본 적은 없었으니까. 정말 새삼스럽지만 난 참 풍요롭게 자라난 인간인 거다.


  • 예전에 누군가 나한테 했던 곱게 자란 놈이란 말을 가끔씩 곰씹어 보곤 해. 각설하고, 결국 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밥 못 먹어서 배고픈 적도 없었고, 등록금 없어서 학교 못 간 적도 없었잖아. 나아가, 읽고 싶은 책은 다 읽었고 듣고 싶은 음악도 다 들었고 보고 싶은 영화도 다 봤고. 누구처럼 막노동판에서 삽질한 적도 없지. 중학교 때 신문배달 아르바이트, 대학생 때 타이핑 아르바이트 정도를 빼고는 (군시절 진지공사 작업을 제외하면) 육체노동이라곤 근처에도 가본 적 없었으니. 그래. 난 곱게 배부르게 자란 놈인 거지.


  • 내 세대가 전반적으로 누린 혜택이라고 생각해. 안암동 무허가주택촌에서 살던 꼬마 시절을 생각해도 그래. 비가 오면 천장으로 물이 새서 밥그릇을 괴어야 했고, 푸세식 변소에 전등이 없어서 밤에는 촛불을 들고 볼일을 보러가야 했지만. 그때조차 난 곱게 자라고 있었던 거야. 집에선 쥐가 나오고 머리칼 틈으로 이가 기어다니던 그 시절에도, 누나들 입던 분홍내복을 물려입기 싫어 짜증은 났어도 춥고 배고프진 않았어. 뽀대나는 집에서 매 끼니 고기 먹으며 살진 못했지만, 그래도 사랑받으면서 밥 굶지 않고 뛰놀며 자랐으니. 이 정도면 곱게 자랐다는 말이 맞아. (물론 지금 다시 그 동네로 돌아가서 그리 살라면 못 살겠지만)


  • 지금 나 사는 모습도 그래. 회사생활이 이러쿵, 외국생활이 저러쿵, 이러니저러니 불만과 고민을 말하지만, 이것도 다 먹고 살 만 하니까 지껄이는 소리잖나. 지금 나는 스무살 때보다 더 많은 책임과 위험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처지지만, 또 스무살 때보다 더 많은 능력과 경험으로 무장된 것도 사실이고. 암만 하루종일 일감에 시달려도, 퇴근길 전철에선 나 듣고 싶은 음악 맘대로 골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풍요로운 생활이잖수. 곱지만은 않았대도 결국 곱게 자라 곱게 사는 처지에, 볼멘 소리는 이제 그만.
2009/12/14 17:33 2009/12/14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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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국화 2009/12/17 05: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서울은 소위 귀떨어질만큼 엄청 추워졌어요_ 뜨거운 감자탕/맛나는 3겹살이 그리워지는계절
    아 그리고 머라이어캐리언니의 캐롤송이 밖에서 하루에 연속5번 들을만큼 가까워진 크리스마스구요_
    저에게 2009년은 갖고있는것 아홉개놔두고 하나채우려고 낑낑대던 한해였습니다 :)
    이젠 그러지말아야겠다능_ 헤헤

    • 범한 2009/12/18 0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기도 어제 오늘은 많이 추웠답니다. 목도리 없인 밖에 못 다닐 정도로.
      그러고 보니 벌써 다음주면 크리스마스에요. 올해도 다 끝났군요.
      귀 안 떨어지게 잘 챙기시구요. 언제 감자탕이나 같이 하면 좋겠네요.

  2. 비밀방문자 2009/12/19 03: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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