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mhan Yu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간밤의 바람은 말을 하였고
고궁의 탑도 말을 하였고
할미의 패인 눈도 말을 했으나

말 같지 않은 말에 지친 내 귀가
말들을 모두 잊어 듣지 못했네

여인의 손길은 말을 하였고
거리의 거지도 말을 하였고
죄수의 푸른 옷도 말을 했으나

말 같지 않은 말에 지친 내 귀가
말들을 모두 잊어 듣지 못했네

- 김민기, "잃어버린 말" 中


  • 무뎌졌다. 무뎌져 간다. 이런 걸 철이 든다고 하는 건가. 죄책감도 무뎌지고 부끄러움도 무뎌지고 호기심도 무뎌지고 열정도 무뎌지고. 그래도 끈질기게 무뎌지지 않고 버티는 것은 짐승같은 식탐과 악착같은 고독감 뿐이야. 이기적이지. 알아. 부끄럽고 씁쓸해. 하지만 그 부끄럼과 쓸쓸함도 무뎌진다.


  • 자선활동을 격려하는 캠페인을 근 3주간 밤낮으로 붙들고 씨름하다 어제 마무리했다. 원더만 네트워크 총 부회장의 개인용 맞춤 광고. 세계 유수의 광고회사 경영진과 거물급 재계 인사들에게만 개인적으로 전달할 목적으로, 그야말로 맞춤 광고지. 배고픔에 시달리는 전 세계 극빈층들을 지원하자며, 유엔 식량기구 및 유수의 국제 구호단체에 힘을 실어주자는 내용이었다. 뉴욕 사는 갑부가 세계 곳곳의 다른 갑부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굶을 일 없고 굶어본 적도 없을 갑부들끼리 주고받는 은밀하고도 고상한 연말 인사.


  • 잘못 돌아가는 세상을 바로잡자며 (또한 고상한 자아를 살찌우고자) 솔선하여 자선을 행하는 갑부 회장님. 그리고 그 갑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프로젝트 추진에 열을 올리는 우리 스튜디오 사장/부사장님네들. 그리고 그 사장/부사장의 신뢰와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밤낮없이 닥치고 헌신하는 까까머리 디자이너. 이거 부끄러운 거니. 몰라. 모르겠어. 무뎌져. 무뎌지고 있어. 배고픈 사람 도와주자는 광고를 만드느라 머리 싸매고 지내면서도, 막상 배고프다고 울먹이면서 먹을 걸 구걸하는 사람들을 아무렇잖게 외면하는 나. 이건 좀 무서운 일인데. 그것도 무뎌져 가나 봐. 울음섞인 목소리, 눈물맺힌 눈동자에도 무뎌지려나 봐.


  • 루시드 폴이 노래했었지. 혼자라는 게 때론 지울 수 없는 낙인같다고, 살아가는 게 나를 죄인으로 만든다고. 나 아닌 무엇도 쉽게 담지 못하는 내 모습이 처연하고, 그러면서도 나 아닌 것을 담지 못해 안달이 난 내 모습이 측은하다. 삼겹살과 버섯을 넣어 끓인 (전골같은) 라면을 게걸스레 먹어치우고 나니 새삼 내 자신이 짐승같아. 언제나 그렇듯, 끝내 내가 집착하는 것은 나 자신이잖아. 배고픈 나, 외로운 나, 그리워하는 나, 고민하는 나. 나, 나, 나. 나한텐 온통 나밖에 없어. 이게 부끄럽지만, 또 무뎌지겠지. 벌써 많이 무뎌졌잖아.


  • 내일은 대학 졸업식이다. 저녁 6시 30분부터 행사 시작이라는데, 그 전에 퇴근할 수나 있을까.


  • 그림 욕심이 그립다. 지난 몇 달, 아니, 2009년 한 해 전반적으로, 별로 그리지 못해선가. 그리워.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싶어. 그릴 시간이 있으면 좋겠고, 그리려는 마음도 계속 있었으면 좋겠어. 그림 그리는 손도 무뎌지고 그림을 그리려는 그리움도 무뎌지는 것 같아서 좀 겁나. 이것까지 전부 뭉툭해지고 나면 나한테 날 선 구석이 하나도 남지 않을 것 같아서.
2009/12/18 00:11 2009/12/18 00:11
http://www.baadaa.net/kc/trackback/235
  1. 디아나 2009/12/19 0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엊그제 반쯤 홀가분하고 반쯤 지친맘으로 교보에 나가서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를 샀어요. 거기에 맘에 드는 부분이 있어서 ^^


    죽음이 임박했을때 갑자기 생기는 삶에 대한 애착은, 우리가 흥미를 잃은 것은 목적이 보이지 않는 삶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영위하는 삶의 일상적인 형태라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불만이 생기는 것은 인간의 경험이 돌이킬 수 없도록 음울하기 때문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특정한 방식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자신의 불멸성에 대한 습관적인 믿음을 버린다면, 우리는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지만 영원하게 보이는 존재의 표면 아래 숨어 있는 수많은 시도되지 않은 가능성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연말이 가까워서인지, 일상의 많은것들이 나른하고 피곤해지는 것 같아요. 이승환의 좋은날II를 들으며 맛있는걸 잔뜩먹고 푹 자다가 인간애벌레, 이불속 뒹굴거림의 발견을 하루 발견해보는것도 괜찮더라구요.

    • 범한 2009/12/19 0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집에 늦게 돌아와 앉아 별 이유도 없이 마음이 헛헛해서
      허겁지겁 맥주를 두 캔째 연달아 들이키는 중입니다.

      늘 아침잠을 아쉬워 하는데도 막상 주말엔 늦잠도 못 자겠더군요.
      고작해야 평소보다 두어시간쯤 더 누워있는 정도. 곧 눈을 뜨고 말아요.
      술기운이라도 빌어서 억지로라도 길게 길게 길게 길게 자고 싶네요.

      주말 느긋이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취중이라 너무 긴 답변은 자제할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