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있던 것이 없어지면 허전해진다. 으레 거기 있던 것이 이젠 거기 없고, 늘상 해오던 행동들을 문득 멈추어야 할 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속담처럼, 대상에 대한 애착이 있었느냐의 여부와 관계없이 일단 애틋해지고 말아. 오랜 연인을 떠나보낼 때, 끼고 살던 컴퓨터가 수명을 다했을 때에도 공허했지만, 그 지겹던 교복을 벗게 됐을 때, 토 나오던 군부대를 떠날 때조차 묘한 상실감이 느껴졌으니까.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 때문이겠지.
- 우리집 유일의 여자 룸메이트가 이제 일본으로 돌아간단다. 샤워를 너무 오래 해서 동거인들 사이에 공공의 적으로 등극했던 (-_-;) 이기적 꼬맹이 미카 양. 어젯밤 내가 포트폴리오 작업 때문에 밤을 새울 때, 이 꼬마는 짐을 싸고 방정리를 하느라 밤을 새웠다. 저녁 무렵 회사에서 돌아와 보니, 욕실/거실/주방에서 이미 미카의 물건들은 싹 비워지고 없었다. 얄밉고 재수없고 짜증나던 (심지어 때로 죽여버리고 싶기까지 했던 -_-) 꼬맹이가 꺼져준다니 신나고 즐거우면서도 한편 짠한 마음도 드네. 앞으론 한 시간씩 똥 참을 필요도 없고 쓸데없이 감성 드라마 연출할 필요도 없으니 좋긴 하다만.
- 하룻밤을 꼴딱 새우고 회사에 다녀와 저녁 9시도 안 되어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대로 내일 아침까지 자버리는 게 원래 계획이었지만, 대충 4시간쯤 자고 나니 절로 눈을 뜨게 되더라. 물을 한 잔 마시고 방으로 돌아와 앉자니,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못 견디게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잠이 채 덜 깬 상태에서 일단 연필을 쥐고 손 가는대로 선 몇 개를 긋기 시작했지. 어김없이. 그림을 놓고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그려야 한다는 불안감이 독처럼 퍼져왔다. 이건 그림에 대한 그리움이라 해야 할까 그저 비뚤어진 욕망이라 해야 할까. 참을 수 없는 충동, 견딜 수 없는 그리움, 유치한 말이지만 내게 그림은 그래. 전문 그림쟁이도 아니고 특출난 그림실력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그냥, 놓을 수 없는 거다. 놓아지질 않아서.
-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면 무엇이든 쉽게 포기하는 나란 사람, 그래서 물건 욕심도 사람 욕심도 그닥 키워본 적 없었지만. 사실 나는 끈질긴 집착과 못 말리는 그리움에 지탱해서 살아가는 인간인 것이었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지켜가기 위해서 그것 아닌 모든 것들을 쉽게 버릴 수 있을 뿐. 난 그리움을 먹고 산다. 옛 연인은 그립지 않고 옛 경력도 그립지 않지만, 철없이 불타는 오랜 꿈들은 아직도 마냥 그립다. 아직도 가슴으로 그리워하는 나의 음악과, 매일밤 내 잠을 설치게 하는 나의 그림과, 수시로 불끈거리는 운동 본능과 (-_-;), 그 주변에 서성거리며 나를 설레게 하는 마음 속 이것과 저것들.
- 그리운 것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삶의 원동력이 된다. 그리운 대상을 그리워할 수조차 없게 한다면 어찌 살겠느냐고. 아니, 그리워할 대상이 아예 없다면 그 공허함을 어찌 견뎌내겠나. 나에겐 오직 나뿐이라서, 보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꼽으라면 (가족을 제외하곤) 한두명 이상 떠올리기조차 어렵지만. 이렇게 그리움의 빈곤에 시달리는 나에게도 그리운 대상은 있다. 나를 버텨내게 하는 뿌리. 자기합리화같지만, 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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