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mhan Yu
영어를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은 일자리가 다르고, 같은 일자리라도 대우가 달라지고 소득이 차이난다. 비(非)영어권 국가 중 국민이 영어를 잘하는 나라가 영어를 잘 쓰지 못하는 나라보다 훨씬 잘산다.
- 이명박 대통령 (당시 당선자)

  • 영어로 돈을 벌고 살았던 탓인지 영어 학습의 비결을 묻는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특히 군대에 갓 들어갔을 때는 밖에서 영어하다 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꼬맹이 고참들이 토익/토플 과외를 요구해대는 통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고. 심지어 헐렁한 내 외모를 보고 무시하던 이가 "쟤 영어 한다더라"는 뒷말을 듣고 무안할 정도로 대우를 달리하는 경우까지 보았다. 유창한 영어발음을 위해 꼬맹이들 혀밑을 째고, 수백만원짜리 영어 유치원에 보내고, 후르릅 혓바닥 굴리는 버터 영어에 갈채를 보내는 사회. 대체 영어가 뭔데, 도대체 미국이 뭐길래 이렇게까지 영어를 신성시하고 미국을 숭상하는 걸까. 아니, 하나 묻자. 영어를 잘 하게 되면 무엇을 하려고 그러나?


  • 영어를 잘하는 나라가 잘 살고,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돈 잘 번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말을 전적으로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수긍할 수도 없다. 통계 용어를 빌자면, 영어와 소득 수준의 관계가 '상관관계(correlation)'일 수는 있지만 '인과관계(causation)'일 수는 없기 때문에. 영어만 잘하면 만사형통이라는 환상은 접어두자. 그래, 거지들도 양담배를 피우고 어린애들도 영어를 한다는 미국에서도 전 국민이 풍요로운 것은 아니지 않나. 본질적으로 '소통 수단으로서의 영어'보다 중요한 것은 '소통해야 하는 지식과 경험'이다. 영어는 도구일 뿐,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래,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면 무슨 말을 할 생각인가. 가정법 과거완료 용법과 분사의 형용사적 기능에 대해서 토론할 텐가.

한 사람의 외국어는 그가 구사하는 모국어의 거울이다. 모국어를 들어보면 외국어 수준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모국어만큼만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고, 모국어의 억양이 대부분 외국어에 그대로 묻어난다.
- 곽중철 (한국외대 통역번역대학원장)

  • F. Scott Fitzgerald라는 작가는 "글은 '쓰고 싶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이 있기에'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던가. 소위 "네이티브 스피커" 수준의 유창한 영어 말버릇을 가진 한국인 아이들은 서울에서나 뉴욕에서나 수도 없이 만났지만, 정작 말같은 말을 하는 친구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강력히 주장하건대, 기술로서의 영어 능력이 중요한 게 아니다. 영어만 할 줄 알게 되면 무슨 얘기든 술술 늘어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어차피 한국말로 할 수 없는 얘기는 영어로도 할 수 없는 법, 곽중철 교수 말마따나 "우리는 모국어만큼만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큰 어려움없이 일자리를 잡았던 것도, 미국에 와서 어렵잖게 새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영어에 자신있어서"라기보다 "한국어에 자신있고, 내 전공 지식에 자신있어서"였다. 외국어 기술은 단지 '그릇'일 뿐이니, 그릇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겠으나 그 그릇에 담을 내용물을 준비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지 않겠나.


  • 영어 공부를 그만두라는 얘기가 아니다. 물론 영어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맹목적인 영어 숭배와 집착을 벗어야 한다는 얘기다. 언어생활은 문화생활이기에, 문법/어휘/청해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별 어려운 단어나 문법을 쓰지 않는데도 미국 심야토크쇼를 보면서 따라 웃지 못하는 건 결코 '공부'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미국사를 공부하고 미국 역대 대통령 이름을 외고 미국 대중문화만 감상하라는 소리가 아니고, 진정한 나다움이 있을 때 타인의 타인다움을 견주고 배울 수 있으니, 미국 따라잡기와 영어 체득하기에만 목숨걸지 말자는 소리다. 영어 8품사는 알아도 국어 9품사는 모르고, 영어 표기법/발음법은 알아도 국어 표기법/발음법을 모른다면, 결국 영어도 국어도 제대로 못하는 병신이 될 뿐이다.


  •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 하게 된다. 서울에서 일을 할 때나 미국에 와서 공부를 하면서나, 문법도 발음도 비틀거리지만 할 말은 꼬박꼬박 잘 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었다. '감각신호의 시상 통과후 피질 전달에 대한 메카니즘'을 한국말로 설명할 수 없다면 영어로도 설명할 수 없지만, 한국말로 할 수 있다면 영어로는 어떻게든 전달할 수 있는 법이 아니던가. "어떻게 말할 것인가"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에 비해서 훨씬 부수적인 문제이다. 할 말이 있어야 말을 할 수 있고, 아는 것과 경험한 것이 있어야 할 말이 생긴다. 혓바닥은 능수능란하게 돌아가지만 머리와 가슴속이 백지장이라면 녹음기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다.


  • 다시 묻자, 영어를 잘하게 되면 무엇을 하려고 그러나. 나에게 "영어학습의 비결"을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가장 먼저 이것을 되물었다. 가령, 통역가 혹은 번역가가 되고자 하는 것인지, 취업이나 진학을 위해 토익/토플/텝스 성적이 필요한 것인지, 유학을 준비하느라 공부와 생활의 기술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취미삼아 여행하고 원서읽기만 하면 되는 것인지, 저마다 바라는 바에 따라 필요한 바가 다르기 마련이고. 필요한 바가 다르다면 서로 다른 부분에 중점을 두고 그것만 취하면 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전 국민이 이보영 씨처럼 유창해질 수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는 말이다. 전국민 영어 능력자 시대를 표방한다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잊고 있는 게 있다. 실제로 '전국민 영어 능력자'에 해당하는 영어권 국민들이 모두 이보영 씨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 불필요한 환상과 욕심을 버리자. 영어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아니라고.
2009/01/19 11:14 2009/01/19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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