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mhan Yu

달려!

unspoken words 2010/01/25 14:14

이병우 - 달려


  • 추위가 많이 잦아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바람이 제법 매섭더라. 요즘엔 3월 21일 하프마라톤을 준비하느라 다시 훈련모드로 복귀중. 칼바람이 부는 밤에는 얼굴과 손등이 다 깎이는 듯 아파서 달리기에 영 좋지 않아. 요 며칠은 심심찮게 비도 뿌리고 있어서 특히 성가셔. 날씨 안 좋은 책임을 누군가에게 따져물을 수만 있다면 딱 그러고 싶다. 뭐야. 오늘 아침엔 지랄맞은 비바람에 출근길 바지 끝자락이 장딴지까지 묵직하게 젖었다고.


  • 겨울 달리기는 출발 직후 10분 정도가 가장 벅찬 느낌이다. 찬 공기를 갑자기 들이키니 폐가 놀라고, 온몸으로 덜컥 피가 몰아치니 심장도 놀라고, 걸음걸음 부담스런 하중에 근육도 관절도 놀라고. 코로 숨을 쉬면 콧구멍이, 입으로 숨을 쉬면 목구멍이 시리고 아파. 몇 발짝 채 떼기도 전에 그냥 오늘 하루는 쉴까 하는 생각이 치민다니까. 근데 신기하게도 10여분을 묵묵히 넘기고 2km 남짓 달리고 나면 전체적으로 편안해져. 호흡도 심박도 평온해지고 근육/관절 쑤시는 기분도 잦아들거든. 물론 다 뛰고 나면 찬 바람 후유증으로 쿨럭쿨럭 얕은 기침 해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 달려서 괴로워진 몸상태를 극복하려면 그냥 꿋꿋이 달리면 되더라. 애초에 달리지 않을 거라면 모르되, 기왕 뛰기 시작했다면 계속 뛰는 수밖에 없어. 물론 그렇다고 아프던 게 안 아파지고 춥던 게 안 추워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견딜만해지긴 해. 게다가, 달리다 말다 뛰다 서다 하면 달리는 시간만 더욱 길어질 뿐이니까. 땀이 식기 전에, 순환계가 진정되기 전에, 한 방에 끝까지 몰아쳐야 돼. 달리는 동안에는 달리는 괴로움을 잘 몰라. 달리다 멈췄을 때, 멈췄다 다시 달릴 때가 참 괴로운 거더라고.


  • 서울에 있는 가족 소식을 듣거나 연락 끊겼던 친구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참 새삼스럽지만 새삼스럽다. 벌써 이만큼 왔구나 싶은 기분. 10년 전엔 까마득하게 먼 노땅처럼 느껴지던 동아리 선배들이 딱 지금 내 나이였고, 20년 전 노처녀라 놀림받던 우리 이모도 지금의 내 나이였고, 30년 전 나를 처음 안았을 내 부모가 지금의 내 나이였다는 거. 놀랍진 않지만 부담되긴 해. 아니, 부담스럽진 않지만 놀랍다고 해야 하나. .여튼 복잡할 것도 없지만 생각이 복잡해 져. 글쎄, 어쨌건, 이런 잡생각에 빠지지 않으려면 또 그냥 달리는 수밖에 없는 것 같고.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또 한참 가 있겠지.


  • 나를 설레게 하는 일이 많이 없어. 많이 없어졌어. 배고플 때 음식 생각을 하면 조금 좋고, 업무에 치일 때 퇴근 생각을 하면 조금 위로가 되지만. 보고 싶어 설레는 사람, 하고 싶어 설레는 활동은 다 어디론가 숨어버렸어. 그치만 달릴 생각을 하면 조금이나마 그런 설렘이 있어. 순수하게 들뜨는 기분 말이지. 스무살 때 연애하면서 느끼던 벅찬 설렘 정도까진 아니라도, 오늘밤 달린다 생각하면 회사에서부터 쪼꼼은 설레. 아직 그리고 싶은 그림도 많고 만져보고 싶은 음악도 많지만, 난 일단 막 달리고 싶어. 죽도록. 숨 가쁘도록.
2010/01/25 14:14 2010/01/25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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