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mhan Yu
  • 나는 언제나 그림이 그리고 싶었어. 아니, 그리고 있었지. 고등학교 1학년 땐 수업시간 야자시간 안 가리고 원근법 공부를 하다 담임선생한테 스케치북을 뺏기기도 했고. 근근이 들어간 대학에선 전공 노트와 교과서 귀퉁이마다 강의실 풍경을 그려놓고 있었거든. 나한텐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미대생도 아니고 갑부 자식도 아닌 주제에 헛바람 들었다고들 해서 그림 그리지 않으려고 억지로 노력도 많이 했다니까. 근데 이것 봐. 대학원에 가고, 경제 생활을 시작하고, 다 늦게 군대도 가고. 그렇게 그림 그리는 일이랑은 영영 상관없어지는 것만 같았는데, 어느샌가 난 그림 그리는 것이 당연한 길을 걷고 있어. 심지어 그 "헛바람"에 "헛짓거리"를 잘 하는 대가로 돈도 받고 칭찬도 받아. 신기하지 않아?  나조차 포기하고 잊고 있던 바람인데, 묵묵히 그리워하는 마음이 깊었더니 거짓말처럼 슬그머니 현실이 됐잖아.


  • 오늘은 클래식기타 녹음용 픽업 마이크를 주문했어. 처음 기타를 잡기 시작하면서부터 갖고 싶었지만 애써 무시하고 있던 물건인데. 10년동안 마음으로 그리고만 있던 걸 결국 사게 된 거야. 그 누군가들이 "헛바람"에 휘둘리는 내 모습이 싫다고 해서, 음악하는 사람도 미술하는 사람도 되지 않으려고 짐짓 다른 길만 바라보고 걸으려 애썼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미치도록 갖고 싶던 장비들이 요즘 하나둘 갖춰지고 있어. 오디오카드, 미디키보드, 작업용 마이크와 헤드폰. 전자기타와 클래식기타. 이젠 기타 녹음용 픽업까지. 날 봐. 잘난 고등학교 잘난 대학교에서 잘난 전공하고는 잘난 회사에서 잘났다고 버둥댔지만, 10년만에 나는 원점이잖아. 오밤중에 잠 못 들어 컴퓨터를 켜고 쿵짝쿵짝 어설픈 박자를 타는 일. 열여덟, 열아홉, 고등학교 때 느끼던 이런 기분이 참 그리웠더라. 그립다 그립다 했더니 끝내 다시 찾게 됐고.


  • 어릴 때부터 난 부모에게 뭔가 사달라고 떼쓴 적 없었지만, 태권도를 배우고 싶다고 했던 적은 있었어. 이유는 몰라도 난 하고 싶었거든 정말. 어렴풋 기억하기론 더 자라고 뼈가 굳어지거든 시켜주마 했던 것 같은데, 당신들에겐 그냥 그렇게 잊혀졌나 봐. 난 안 잊었는데.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도록 태권도 따위와는 상관없이 살았고. 대학교에 들어가서 내 선에서 해동검도, 검도, 아이키도를 전전하다가 결국 입대 전에 태권도 단증을 따게 됐더랬지. 이거 좀 우습지 않나?  국민학교 입학하던 무렵부터 하고 싶던 태권도, 아무도 안 시켜주니까 한참 꿍꿍이를 키우다가 끝끝내 내가 시작하고 말았잖아. 20대 전반에 나를 그리 좌지우지하던 누군가는 내가 그림 그리는 것도, 음악에 매달리는 것도, 운동에 집착하는 것도 못 마땅해 했었는데. 지금 보면 결국 그걸 다 악착같이 하고 살아.


  • 올해 여름이면 나도 만 서른살이 된다. 많을 것도 없지만 적지만도 않은 나이. 그런데 어찌 보면 스무살 되던 해랑 똑같은 처지에 놓여있더라. 대학 가면 그림도 지겹도록 그리고 음악도 질리도록 매달리자 다짐했는데, 막상 20대를 보내면서 한 번도 만족해본 적 없었더니. 10년간 미뤄왔던 그 충동을 이제야 달래고 있잖나. 공부할 땐 공부하고 싶은 줄 알았고, 일할 땐 일을 하고 싶은가보다 했지만. 정말로 내가 즐거워하는 일들은 따로 있었던가 봐. 참 그리웠어 이런 느낌. 막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된다더니, 노래 가사같지?  버리려 한다고 버려지지 않는 것들이 있더라. 요즘 그런 느낌을 받아.


  • 타인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나를 만족시키는 일을 보류하는 건 습관이 됐어. 그런 면에선 만족시켜야 할 대상도 배려해야 할 대상도 없는 지금의 외톨이 생활이 내게 약이 되는 것도 같다. 눈치보지 않고 신경쓰지 않는 생활 속에서 내가 많이 나다워졌다는 생각이 들거든. 언제나 남의 옷을 입고 남의 삶을 사는 것처럼 어색했는데, 적어도 지금 이 생활은 내가 나같지 않아서 어색하단 느낌은 없으니까.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들을 못 하게 막아서고 육탄 저지했던 그때 그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할까봐. 덕분에 오만가지 다른 대안을 쑤시고 다니면서 도리어 지금의 내 결정에 확신을 갖게 될 수 있었으니까. 더 절실해졌어. 고마워. 절망 속에서 그리워하는 절실함을 알게 해줘서.


  • 밀린 빨래 하고 돌아와서 맥주 좀 마셨더니 두서없이 말만 많아졌네. 이젠 자련다.
2010/02/06 02:04 2010/02/06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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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맑아릿다 2010/04/01 04: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부분에서는 운명이란 것도 작용하는 모양이에요. 차이코프스키네 어머니가 그렇게 음악하는 걸 반대한데다 차이코프스키가 공부까지 잘하는 바람에 법대를 갔는데 결국 졸업하고 음악을 했다나요(<-)

    이 글 코퍼스에 담아도 될까요?

    • 범한 2010/04/03 1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하는 것 양껏 담아가시라고 알려드린 주소였으니
      따로 묻지 않고 챙겨가셔도 괜찮습니다. (^^)

      아, 칸딘스키 옹 또한 공부 잘 하고 미친듯 똑똑해서
      법대 가고 법관 되고 젊은 나이에 교수직까지 제안 받았지만
      서른살 나이에 몽땅 정리하고 독일로 건너가 그림을 시작했다죠.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시절에 동경해 마지않던
      "전람회"의 서동욱 씨는 (당시 연대생) 음악을 접은 후
      지금 두산 그룹의 상무로 근무하고 계신다던데.

      .... 오묘한 운명의 엇갈림이랄까.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