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mhan Yu
  • 나무마다 꽃눈이 돋고 파릇한 빛깔이 맺히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부쩍 가볍고 화사해졌어. 스치는 얼굴마다 설렘이 가득하더라. 봄이야 봄.


  • 어젯밤 마신 술 때문인지 아침부터 두통이 심했지만, 집에만 쳐박혀 있기 싫어서 무작정 집을 나섰다. 마땅히 갈 곳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이 시내를 정처없이 떠돌았다. 평소에 다니지 않던 길로만 골라서 몇 시간을 걷다 보니, 이 낯선 땅에 아무렇잖게 살고 있는 내 모습이 문득 거짓말처럼 느껴지더라. 화창한 봄볕 아래 왁자지껄 즐거운 사람들 틈에 먼지처럼 맥없이 떠도는 꼴이 괜스레 처량하기도 했고.


  • 서점에 들러 책 구경을 하다가 다분히 충동적으로 또 몇 권을 사들였다. 지난 번에 한 보따리 샀던 책들도 아직 다 읽지 못했는데, 나날이 허둥지둥 뛰다 보면 지금 사는 책들도 금세 뒷전이 되고 말 텐데. 알면서도 굳이 샀어. 몇 주째 죽도록 일만 하던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누가 위로하지도 챙겨주지도 않는 처지에, 나라도 나를 다독여야지.


  • 유니언스퀘어 주말 그린마켓 한 켠엔 유기묘 입양 판촉 테이블이 자리잡고 있었다. 초롱초롱한 아기 고양이들을 보자니 마음이 왈칵 뜨거워지더라. 이리 철없고 순수하고 취약한 것들이 험악한 거리에서 얼마나 지쳤을까. 거창한 동반자까진 아니라도 다정한 벗이 절실한 생활, 고양이 친구 하나 업어오자고 결심한 게 벌써 몇 년인데. 당장 손을 뻗고 싶었지만 알레르기가 있는 룸메이트 생각에 다시 한 번 꾹 참을 수밖에 없었지.


  • 지하철 역을 향해 걷는데 한 처자(누가 봐도 자선단체 홍보요원)가 말을 걸어 왔다. 하루종일 누구랑 말 한 마디 섞지 않았던 터라, 그냥 누가 말을 건네는 것이 싫지 않아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Children International, 전 세계 극빈층 아동들을 지원하는 기구라 했다. 한참을 서서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 달에 $22씩 지원하기로 동의하곤 서명했다. 나도 참 불평거리 많고 팍팍한 인생이지만, 깨끗한 물이 없어서 설사병으로 죽어가는 처지는 아니니까. 당장 오늘 사들인 책값만 해도 $100가 넘었는데, 이따금 번듯한 저녁 한 끼 먹는 돈이면 누군가의 삶에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실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뭔가 부끄러워졌다.


  • 뜻대로 풀려주지 않는 일들이 자꾸만 나를 지치게 해. 고백하건대 요즘엔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들다. 기댈 곳은 없더라도 말 나눌 사람쯤은 있었으면 좋겠는데. 덜어내지 못한 짐들, 해결하지 못한 감정들이 차곡차곡 가슴 속에 쌓인다. 숨이 막힐 듯한 정서적 변비 상태. 내 얘기를 들어줄 이, 내게 이야기를 건넬 이가 점점 더 고파지누나. 나답게 살겠다고 한 걸음 뗄 때마다 그만큼 더 깊이 고립되는 기분이야. 고개 쳐박고 고분고분 살지 않은 대가일까.
2010/04/03 21:32 2010/04/03 21:32
http://www.baadaa.net/kc/trackback/322
  1. 맑아릿다 2010/04/04 07: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봄이에요^ㅅ^ 이 아름다운 봄날에 나는 집에 처박혀서 모니터랑 놀고 있다니 OTL
    분명히 시간을 많이 쏟아붓는데 어째서 진도가 안 나갈까....

    약먹은 병아리처럼 꿉벅꿉벅 졸고 있다가
    에잇, 계란 먹는 날인데 계란 얻으러 성당에라도 갔다와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에요/ㅅ/

    • 범한 2010/04/04 12:20  댓글주소  수정/삭제

      종류 불문하고 모름지기 숙제란 한방에 뚝딱 끝낼 수 있는 게 좋더군요.
      긴 시간을 두고 진득하게 처리해야 하는 과업만큼 피곤한 게 있을까요. ;
      무사히 꿋꿋하게 헤쳐나가시길 바라고 있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맑아릿다'라는 별칭은 세례명에서 가져오신 건가 봐요.
      성녀에 대한 이미지가 음성상징을 통해 새롭게 거듭나는 느낌.

  2. 2010/04/04 2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헉!
    숙제.
    무서움.
    어이할꼬.
    해치워야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