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 한 일을 훗날에 다시 할 것이니
저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 전도서 1:9
- 인용하기 좋아하는 말버릇이 때로 내 발목을 잡는다. 남의 목소리, 남의 생각을 빌어쓰면 남의 권위까지 함께 업어올 수는 있지만, 그 안에 내 생각이란 없는 것 같아 공허해진다. 나는 남의 것에 기대지 않고는 생각할 줄도 말할 줄도 모르는 껍데기란 말인가. 본디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지만, 굳이 타인의 그림자 안에만 머물려는 것은 비겁하고 초라하지 않은가.
- 고등학교 3학년 어느 여름밤, 침대에 누웠다가 퍼뜩 떠오르는 소리가 있어 서둘러 일어나 컴퓨터를 켰다. 양쪽 귀에서 연주 소리가 스테레오로 들려오는 것 같았고, 하나라도 놓칠까 한참동안 신들린 듯이 미디시퀀서를 붙들고 찍어댔는데.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면서 곰곰 생각해 보니 그 멜로디와 그 반주는 어릴 적에 라디오에서 들었던 어느 노래와 똑같은 거였더라. 괜히 부끄럽고도 허망해서 그날 종일 고개도 들지 못했다. 나의 상상력은 나의 기억력에서 몇 걸음이나 떨어져있는 걸까. 내가 만들고 내가 적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정말 온전히 내 안에서만 나왔다고 할 수 있을까.
- 디자인 전공을 시작하고 미술 전공을 준비하면서 이따금 내가 얼마나 '참신한' 재목인가에 대해 회의하곤 한다. 잡다한 소프트웨어를 다루는 일, 각종 코드와 스크립트를 작성하는 일, 필요에 따라 그림을 그리고 문서를 작성하는 일 따위, 기술적인 기능에는 적잖이 익숙해졌다지만. 누가 시키고 지시하는 일을 그저 수행하는 것이 아닐 경우, 내 뜻대로 내 판단에 따라 구상하고 추진해야 하는 일들 앞에서 나는 과연 얼마나 참신한 역량을 보일 수 있을까. 나는 기껏해야 기계같은 실무자일 뿐 치열한 기획자가 될 수는 없는 인간인 건 아닐까.
- 허영심만 가득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다. 허풍쟁이, 허영쟁이, 거짓말쟁이. 나는 떳떳하고 싶다. 남의 것을 가져다 그럴 듯하게 덧칠하고 포장해서 내 것인 양 으스대는 껍데기 병신이 되진 않을 테다. 중심을 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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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즐거운 설 연휴 보내세요~!
FROM 해바라기 C 2009/01/23 22:36 삭제2009년 1월 24일





아 ㅠܫㅠ ~ !
저도 하루에 수십번은 고민하는 문제네요...고민 고민 하다가 스스로 켄슬해버리는 것들도 많고...
언젠가 이 고민들 중에서 누가 봐도 멋진 하나 만들어보는게 소원입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흡수하지 않고 순수하게 내 것을 만들어 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일꺼에요. 남에 것을 흡수하고 버리는 과정에서 남은 것들을 정제해서 '내 것'이라는 뭔가가 형성된다고 생각합니다.
범한님은 좌뇌 우뇌의 특성을 모두 자유롭게 활용하시는 것 같아 너무 부러워요. 누구보다 창조적인 재목이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설 인사 트랙백을 걸었는데... 순수하게 인사로 받아주세요. 멀리 계시니 조금 죄송한 마음이...
초등학생도 포토샵을 쓰고, 전 국민이 미니홈피/블로그를 뒤적이는 시대.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가 하는 것은 이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문제인 것 같아요. 멋져보이는 남의 생각과 남의 글, 남의 그림들을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겠지만. 가끔은 "남의 영향"만 있고 "내 것"은 별로 없어 보여서 허무해지곤 해요.
며칠 전에 웹툰을 보다가 "김상병이 안 시켰는데 조이병이 걸레빨랴"라는 대사를 보고 한참 웃었어요. 한국 애니메이션 기술력이 일본과 미국의 하청 업무는 기가 막히게 해내면서도, 막상 한국의 독립 애니메이션은 크게 성장하지 못하는 상황도 새삼 생각해보게 되고. 누가 지시하고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서 멋지게 슥슥 해내는 똘똘한 인간들을 막 동경하게 됩니다.
칭찬의 말씀 고맙고 황송하게 받을게요. (^^) 설날 인사도 반가웠어요. 오늘밤엔 오랜만에 집에 전화나 한 통 해봐야겠네요.
ㅎㅎㅎ 보진 못했지만 뼈가 있는 웹툰인 것 같네요.
만화화실에서 생활을 떠올려보면, 시간에 쫒겨 일단 마감을 끝내는게 목적이 되다보니 나무를 포토샾 브러쉬를 이용해 빨리 완성하는 법이나 톤을 불러와 붙이는 단축키의 더 효율적인 배치 같은 기술적인 대화가 주를 이루게 되더라구요. 그러고 나면 탈진 상태... 내용이나 연출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에요.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쪽 인력들도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 같애요.
후에 출판사에 가서 제가 들었던 것이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어디 나무랄 때가 없어요. 단지...' 이런 식의 말이 많았어요.
그림이 심하게 부족할 때는 그림실력이 너무나 중요하게 보였는데. 요즘은 내용을 잘 써내는 사람들이 훨씬 부러워요. 말씀하신 똘똘이들. ^ܫ^ 히~!
항상 무뎌져있던 것들에 생각할꺼리를 주시니 좋습니다.
술 너무 마시지 마시구요~! 적당히 기분 좋을 만큼~!
^ܫ^ /
데이빗 칼슨(David Carson)이라는 그래픽 디자이너가 있죠. 혜성처럼 나타나 스타급 디자이너로 떠오른 유명인사인데, 이 사람은 원래 사회학 전공으로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사람이었답니다. 디자인이나 미술계통에서 전문적인 교육이나 훈련을 받은 적도 없었던 사람인 거죠. 이 분은 굉장히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스타일 덕분에 등장하자마자부터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어떤 면에서는 본격적인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스타일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디자인 교육/훈련 커리큘럼에서 각종 원리/원칙/이론을 배우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배우고, 효율적인 접근방식을 배우고 나면 그걸 깨버리기란 쉽지 않은 법이니까요.
북한출신의 귀순 피아니스트가 "한국의 음악계는 누구 밑에서 배웠느냐가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한다. 심지어 연주 스타일만 보고도 그 스승이 누구인지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 내가 백악관에서 연주를 했던 것은 '피아니스트'이기 때문이지 '북한출신 피아니스트'이기 때문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던 인터뷰 토막이 기억나네요.
만화계에서도 어느 작가 화실에서 생활했느냐에 따라 뚜렷한 그림색이 나타나는 걸 많이 보는데. 때로는 그 그림자가 너무 강해서 결국 스승의 영향을 다 벗어버리지 못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얼핏 보면 마치 모작이나 아류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죠. 말씀하신대로, 타고난 천재가 아닌 이상, 남의 것을 흡수하고 버리면서 정제하는 과정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을 잃고 남의 것에 먹혀버리지 않으려면 그만큼 치열한 노력도 필요할 것 같구요.
저녁식사하면서 반주로 맥주 한 캔 마셨는데, 살짝 미진한 기분이 들어서 한 캔만 더 마시고 자려구요. 새해 복 받아요. ^_^
저도 그랬을때 녹음기에 멜로디 녹음시키고 코드 짚고 오케이 시작 . 해서 연주해봤더니 제길 .
레드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 이였던거에요 . 어쩔수 없나봐요 . 보았던 것 들었던 것들로 만들어 내니까 . 참참 . 새해 福 많이많이요 - 고기로 배를 두둑히 !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을 이따금 곰씹곤 해요. 인간 사회에서 역사가 기록된 것만 해도 5천년이 되는데, 고작 20~30년 산 주제에 완전히 새로운 창작을 해낸다는 건 턱도 없는 욕심인 거겠죠. 결국 원래 있던 것을 얼마나 독창적으로 받아들이고 독창적으로 토해내느냐의 문제일 겁니다. 가령, 전형적인 블루스 12마디 패턴이나 락앤롤 파워코드 진행을 보고 표절이라고 하진 않잖아요. 원래 있던 것과 내가 만든 것 사이의 경계선은 언제나 모호한 것 같아요.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일인가 봐요. 국화양도 새해 복 많이 받고 새뱃돈도 많이 받아요. (^^)
(새뱃돈 많이 벌거든 한번 놀러 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