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피(-graphy)라는 접두어는 어원상 '기록행위'를 뜻하며 흔히 예술/기술/학문 분과를 구분하는 말에 사용된다.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는 원천적으로 활자를 설계/배치/정렬하는 기술이라고 하겠지만, 나아가 문자의 구성 요소를 체계화해서 조직적으로 이해하는 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활자 해부학이라고 할까. 세간에서 흔히 사용되는 것처럼 '글자로 만든 예술'이나 '글자체(폰트)'에 국한되는 개념이 아니라, 좁게는 각 자획의 형태에서부터 넓게는 전체 텍스트의 가독성과 시각적 심상에 이르기까지 '활자의 알파에서 오메가'를 총괄하는 방대한 개념.
- 타이포그래피는 혈통상 캘리그래피(calligraphy)에 뿌리를 두고 있다. 캘리그래피는 글씨를 예쁘게(calli-/κάλλος) 쓰는(-graphy/γραφή) 방법론을 말하는데, 유럽 문화권에서는 주로 중세 수도승들의 미려한 성서 필사 기술을 중심으로,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주로 한자 붓글씨 기술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어떤 형태를 모범적인 글자체로 볼 것인가'를 수세기동안 연구/보완해서 축적한 집합적 지식인 셈이다. 가로획과 세로획의 굵기 비율에 대해. 자획과 자획 사이, 글자와 글자 사이, 행과 행 사이, 문단과 문단 사이의 적정 거리에 대해. 장문을 쓸 때 문단의 전체적인 시각적 형태에 대해. 문단 첫 글자의 꾸밈에 대해. 서체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굵기/기울기/크기 등을 변형하는 방법에 대해. 기타 등등.
- 로마자와 한글의 형태상 차이는 막대하지만, 가장 원천적인 차이는 문자폭이 일정한가의 여부에서 시작된다. 한글을 처음 배우는 초등학생들은 바둑판 모양의 공책을 사용한다. 한글의 모범적 형태는 '가상의 정사각형에 자모를 채워넣는' 방식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한글은 모든 글자가 동일한 높이와 폭을 갖는다고 전제하고, 각 글자 사이의 공간도 일정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로마자의 경우는 삼각형/역삼각형/원형/사각형 등 개별 형태가 다양하고, 따라서 자폭도 변화가 심하며, 대소문자의 차이에 따라 일부 글자는 행의 위/아래로 삐져나가는 등 수많은 변칙이 존재한다. 한글에서는 활자간 거리를 균등배치하면 전체적 통일성이 얻어지지만, 로마자에서는 활자간 거리를 똑같이 배치했다간 도리어 통일성이 흐트러지고 만다. L와 O 사이의 거리는 I와 L 사이보다는 가깝게, A와 V 사이보다는 멀게 설정해야 전체적으로 안정된 느낌이 생기는 식이니까. 물론 거의 모든 영문 워드프로세서에서는 이러한 자간 설정을 따로 손보지 않아도 자동으로 조정된다. 그게 영문 타이포그래피의 일부니까.
- 로마자 알파벳은 기초 형태가 완성된 것만 대충 2천년. 그 2천년간 전 유럽의 모든 학자들이 똑같은 문자를 사용했으며, 특히 중세에는 교회를 중심으로 전 유럽의 수도승들이 똑같은 문자를 체계적으로 갈고 닦았을뿐만 아니라, 구텐베르크 활자 발명 이후로는 수백년동안 전 유럽의 조판 기술자들이 똑같은 문자 체계를 발전시키고 개량해 왔다. 계획없이 점진적으로 축적된 문자라는 태생적 한계를 끈질긴 노력으로 극복해 낸 사례랄까. 쐐기문자에서 페니키아 알파벳으로, 다시 그리스 알파벳으로, 결국 로마자로 자리잡기까지의 역사는 비계획적/비과학적인 과정이었지만, 초기 로마자 알파벳이 현대 서구 알파벳 체계로 확립된 것은 철저하게 계획적/과학적 과정이었다는 얘기다. 반면, 한글은 계획적/과학적으로 발명되었지만 사용된 역사가 수백년으로 짧은 편이고, 사용 인구도 주로 한반도에 국한되니 적은 편이며,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는 사실상 한글 활자의 역사 자체가 없다. 문자의 완결성에 비해 활자의 완결성은 미흡한 것이 현재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현실.
- 한글 타이포그래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사실상 15년 남짓이나 됐을까. 넉넉하게 생각해도 20년을 넘기진 못한다고 봐야겠지. 90년대 초반 이후 컴퓨터가 급격히 확산되면서 글자체의 전산화가 절실해졌을 때, 수백년간 광범하게 타이포그래피 지식을 축적해온 서구 문화권에서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그 수요에 대처할 수 있었지만, 우리나라(어쩌면 아시아권 일반)에서는 '체계적인 전산화'는 차치하고 일단 '전산화' 자체가 급급한 실정이었으니까. 90년대 중반까지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던 조합형/완성형 한글의 표준 논란이라든가, 일본의 기술력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생산되던 초기 한글폰트들의 경우가 대표적인 단면이겠다. 한글은 대략 500살 할아버지, 대한민국은 대략 50살 아저씨, 한글 타이포그래피는 10대 청소년, 이렇게 비유하면 말이 되려나. 1000살을 바라보는 로마자 타이포그래피의 무게를 따라잡으려면 우리에겐 숙제가 많다.
- 한국에서는 디자인을 공부하지 않았던 탓에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역사는 상세하게 알지 못하지만, 서양에서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하면서 로마자 활자의 해부학이 얼마나 심도있게 자리잡혔는지는 잘 알게 됐고. 활자와 인쇄매체를 직업으로 삼고 나서는 전문가들 사이에 체계적 타이포그래피 지식이 얼마나 '보편적 상식'으로 소통될 수 있는지도 경험하게 됐다. 순전히 문자의 (해부학적) 구조를 설명하는데에만 30개 정도의 용어가 사용되고, 문장/문단 내에서의 문자 배치관계를 설명하는데 추가적으로 15개 이상의 용어가 사용되며, 형태에 따라 글꼴을 분류하는 기준도 한 손에 꼽지 못할 정도로 많다. 물론 숫자와 문장부호를 다루는 방법론 역시 체계적으로 자리잡혀 있고. 그러니 서양 사람들이 알파벳으로 만든 일러스트나 글자로만 된 포스터를 세련되게 잘 만들어내는 것은 단지 로마자가 예쁘게 생겨서가 아닌 거다.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문자/활자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 거지.
- 나는 언어학도로서 한국어와 한글을 아끼고, 디자이너로서 활자를 사랑한다. 전 국민이 음소문자로서의 한글 구성 원리를 다 알 필요는 없어도 최소한의 훈민정음 소양은 갖춰야 한다는 게 내 바람이고. 전 국민이 활자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한글 활자에 대해서 뿌리부터 체계적인 지식화는 이뤄져야 한다는 게 내 믿음이다. 단순히 일회성 소모품으로 예쁘장한 글자체를 설계하는 것만이 타이포그래피의 전부는 아니니까. 한국사람들이 한국말을 등한시하고 한글을 천시하는 시대, 활자를 직업으로 다루는 사람들조차 한글 활자를 차근차근 설명하지 못하는 현실. 지금은 그냥 과도기적 시기일 뿐이라고 믿고 싶다. 시간은 오래 걸릴지 몰라도, 아직은 허공에 떠다니는 종이조각같은 지식들이 언젠가 완결된 큰 그림으로 자리잡게 될 거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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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죠. 총체적으로. 일단은 그냥 믿어야죠. ;
내가 언젠가 들었던 타이포그래피 수업에서.
그 구구절절한 양식이며 작은 부분까지 세세히 붙이는 이름까지 새록새록 기억이 나누만.
그 때 선생님 말씀이...알파벳의 타이포그래피를 따라잡으려 노력하는 건 바보같은 일이라고 하셨지. 우리 글만의 독특성을 간파하고 그를 위해 미와 가독성을 축적해나가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간판글씨와 같이 일회성의 활자를 늘이지 말고 한 디자인을 심혈을 기울여 세심히 다듬어 가는 일이 더욱 필요하다며 글자를 키워보고 줄여보고, 붙여보고 띄워보면서 필요한 부분을 발견해야 한다고 했던 얘기가 생각나. 그런 다음 자신만의 타이포를 만들어 손글씨며 캘리그래프를 시작하자고. 나는 그때 디자이너가 아니라 그저 옳거니 했지만, 같이 듣던 디자이너들은 갸우뚱 하는 눈치였는데...
한글이 로마자랑은 워낙 뿌리부터 다르니까
로마자 타이포그래피를 차용하는 건 애초에 한계가 있고
한글의 구조와 특성에 맞게 기초부터 틀을 짜야할 터인데
역시 개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그냥 계란으로 바위치기일 듯.
무슨 한글 활자 콘소시움이라도 생겨난다면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