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백수가 됐다. 국가는 입영통지서를 보냈고 연인은 이별 통보를 날렸다. 통장엔 남은 돈이 없었고 내겐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피곤해도 잠이 들지 못했고 기력이 없지만 밥이 먹히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종일 자지도 먹지도 않으면서 조각퍼즐을 맞추거나 퍼즐백과 따위를 붙들고 시체처럼 지냈다. 내가 이렇게 무능하고 보잘것없이 병신같은 놈이었구나 생각하면서.
- 3월 초 어느 주말이었나, 할머니와 누나들과 함께 창경궁 나들이를 나갔다. 겨울이 다 간 것 같아도 봄은 아직 오지 않았던 스산한 오후, 우리는 한적한 고궁 안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별 멋없는 사진을 찍고 뜻도 없는 얘기를 나누고.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어쩐지 나는 뜨거운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 벌써 8년이 다 돼 가는구나. 까마득하게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인터넷에서 우연히 누군가의 고궁 사진을 보면서 퍼뜩 그 날 생각이 났다. 이미 군대도 다녀왔고, 떠나갈 연인들은 벌써 다 떠나갔고. 지금 난 백수도 아니고 그럭저럭 잠도 자고 밥도 먹고 지낸다. 그래, 나쁘지 않지. 더 나빠질 것도 없다. 할머니 생각도 나고 가족들 생각도 나지만. 어쨌건 지금 난 그래도 사는 듯이 살고 있다. 언제건 다시 서울에 가게 되면 창경궁에 꼭 한 번 가봐야겠다. 쳐지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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